동물 다섯 마리 사진 찍기 미션

아이는 ○○까지 등하교를 하고 있다. 근 2시간 거리지만 인천에 이사 와서도 시흥에 있는 교회를 기꺼이 다니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똑같은 가방을 메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엄마, 산책길에서 동물 사진 다섯마리 찍어 보내~”

매사 긴장해야 했던 사회생활이 끝나고 나니 승모근 통증이 절로 사라졌는데 대신 그 자리에는 우울과 불안이 자리했다. 잠을 잘 못 잤는지 허리가 아파 걷기 싫기도 했다. 영하의 날씨도 아닌데 롱패딩 차림이었다. 제법 바람이 불어 나쁘지 않은 옷차림이었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은 예전보다 짧아지고 얇아졌다.

아이가 낸 숙제를 하기 위해 강가로 바짝 붙어 걷고 있는데 이른 아침이라 동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길고양이를 만날 수 있을까 했지만 멀리 비둘기 한 마리를 찍었을 뿐이었다. 혹시 사람을 동물이라고 우겨볼까 잠깐 생각이 스쳤지만, 도촬은 옳지 않다. 되돌아오는 길에 마른 나뭇가지의 노란 새(꾀꼬리로 추정)를 보았다. 아, 너무 예뻤는데 역시 틈을 주지 않는다. 귀여운 참새들 무리도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날아가 버린다. 참새 사진은 숨은그림찾기 수준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하루 30분 엑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엑셀을 전혀 못하는 건 아닌데 함수나 단축키, 많은 데이터를 원하는대로 추출하는 연습을 해보고 싶어 시작했다. 메모까지 해가며 30분 한다던 공부가 2시간이 넘어갔다.
단종앓이 때문만은 아니다. 갑작스레 떠오르는 상념이 죄책감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나는 인생을 통틀어 아버지 돌아가실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었다.
“이거 해서 뭐해? 네가 어디에 취직할 줄 알고? ” 라는 사고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감정은 몸을 움직여야 해결된다고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 교수가 말했다. 그래서 오후 산책을 또 나갔다. 가을 날씨처럼 청명하고 맑았으니까 충분했다. 그늘지지 않은 곳으로 걸었다. 평소보다 더 멀리 걷다보니 ○○동 성당이 나왔다. 한참 시선을 두고 있다 발걸음을 돌렸다.
군데군데 봄 기운이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푸릇하게 새싹이 돋기도 하고 그 사이 드문드문 쑥도 보인다.

강가의 왜가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왜가리를 만났다. 강가에서 곧은 자세로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가까이 있어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조그마한 새들과 달리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물에서 나와 조심조심 수풀 위를 걸어 다닌다. 늘 물에 잠겨있던 왜가리의 발이 닭발처럼 생겼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었다. 왜가리의 가늘고 긴 까만 깃털이 바람에 나부끼지 않았다면 “화면정지 아님” 자막이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아이가 곧 하교할 시간이다. 4개의 동물 사진을 보냈다. 오늘 간식은 삶은 계란이다.

– 왜 5개의 동물사진이야?
– 5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

– ITZM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한적한 평일,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1시간 넘게 듣고 있다. 퇴사하고 한 달만에 집순이 루틴에 적응해 버렸다.

‘전기세가 평소보다 더 나오겠구나.’

일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보지만, 대부분은 집안 일이고 빌려온 얇은 책들은 1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50대, 이혼녀, 실직자로 가득 채워졌다. 정답을 찾고 싶은 검색 덕이다.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찾지 못했다. 50의 마음가짐이란 모든 50대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욕심을 버리라는데 응?

내가 얼마나 욕심을 부렸다고.
1인 분 밥값이나 좀 하겠다는데.

논어가 등장했다가 주역이 등장했다가 50대 빈곤에 대한 이야기, 평범했던 사람이 노숙자가 된 사연들을 보면 답답해 져왔다. 언제나 내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막을 깨는 초인종 소리, 소독을 하러 왔다는 아주머니는 약품통을 백팩처럼 메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있다.
PC앞에서 여러 일들을 처리 하다보니 1~2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갱년기 약을 먹어야 할 타이밍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없는 것처럼 숨죽이며 있을 때도 있고 주방에서 달그닥 거리며 부지런을 떨 때도 있다. 남는게 시간이라 중고로 샀던 식기 세척기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아이가 초저녁 잠을 청하고 있는 동안 오늘 하루 종일 밖을 나가지 않아 옷을 주섬주섬 입고 똥강으로 산책을 갔다.

어딘가 모여든 사람들, 원앙 2마리가 강가에서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오기 전에 얼릉 멀리 가야할 텐데 라고 말했다. 나는 고양이가 원앙을 잡아먹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몇 걸음을 못 가 원앙을 사냥해 먹는다는 그 길고양이를 만나게 되었다. 캣맘도 있는 것 같은 흔적들이 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을까.

대학생이 된 아이는 수업을 듣고 오자마자 학우들에게서 받은 먹거리를 호주머니에서 꺼낸다. 매일, 삶은 계란부터 홍삼 스틱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아이 학교에는 만학도들도 많아서 간식거리는 대부분 그 분들이 싸오셨으리라 . 아이는 학교에서 들었던 강의 내용이나 인상 깊었던 일들을 재잘댄다.

중학시절, 학교 다녀오면 가방을 내려놓자 마자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가 듣던 말던 재잘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암투병을 시작하면서 우리 집의 시간은 멈추었고 고독한 사춘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이 세차게 지나간 후 나는 영원히 엄마에게 나를 말하지 않았다. 독립이 아니었다. 단절이었다. 줄곳 타인에게 나를 말하거나 싫다는 내색을 하거나 요구하는 일에 서툰 이유다. 내내 그래왔다.
불과 얼마 전에 퇴사한 회사에서 마저도.

-ITZM

50대 실직자의 낯선 산책기

해가 있을 때 걷고 싶어 서둘러 긴 모직코트에 얇은 목도리까지 두르고 산책길을 나섰다. 오랫동안 집안에서만 지내는 은둔형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모른다더니 딱 그 꼴이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소리를 내며 불편한 걸음을 하는 장애인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보호자로 보이는 분은 그와는 조금 떨어져 앞서 걷고 있었다. 어쩌다 그와 걸음 속도가 비슷해져 꽤나 긴 코스를 내내 같이 걷게 되었는데 그가 내는 소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움찔했다가 있지도 않은 에어팟을 호주머니에서 뒤적거렸다. 어지러움 때문에 요즘은 에어팟도 잘 안끼니까 가지고 오지도 않았던 것. 그래도 조금 더 걷다보니 그 소리도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목도리는 풀고 손으로 들고 다녔다. 외투를 벗어도 좋을 만큼 날은 관대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벼운 외투를 입고 있고 겉옷을 벗어 허리춤에 동여매고 뛰는 사람들도 보였다.

똥강엔 녹조도 심하고 물도 더러운데 불법 낚시꾼들은 평일보다 많았다. 낚시금지가 여기 저기 꽂혀 있었지만, 진짜 물고기가 잡히는지 의문이라 가까이 다가가 생선(!)이 정말 잡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다른 산책로를 걷고 싶어서 검색했는데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 포기하고 마저 걸었다.
이 곳이 낯설어서 싫은 건지, 낙후된 풍경들이 싫은 건지, 어쩌다 인천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선택했지만, 내가 선택한 것 같지 않은 느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싶은 순간들, 모든게 꿈 같아, 부대껴도 이제야 나 답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실직하고 나니 모든 게 바사삭 부서졌다.
중장년 취업 솔루션이나 후기들을 보면 더 답이 없어 보이더라고. 나만 가진 고민도 아니고 누구나 이 나이의 실직은 좌절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쓸모를 증명하려 애를 쓸수록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증명하지 않고도 살 수 없을까. 최소한 나 스스로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사랑스러울 순 없는 것일까.

내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사회복지사도 생각해봤는데 그 공부도 2년은 걸리겠고 그동안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지 싶었다. 구인공고를 볼 때마다 내가 가려고 하는 회사의 지원자는 대부분 20-30대고 나는 시니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장년 치곤 PC와 AI툴을 잘 다루는 사람이고, 어쩜 이렇게 애매할 수 있나 싶더라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아니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 하다하다 산책길가의 바윗돌마저도 슬퍼 보였다. 지독한 우울증은 몸을 움직이라 말하는데 전정발작(어지럼증)은 무조건 쉬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햇살 아래서 걷겠다고 한 나 자신은 칭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