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봄, 알고보니 흔한 풀꽃

봄 풀꽃

푸른 잔디밭에 청춘들의 데이트 하는 뒷모습, 거기 있지 않아도, 내가 주인공이 아니여도 보기만 해도 좋은 봄,
한결 너그러운 바람에 맡아지는 적당한 봄내음, 팔랑이는 머리카락에 얼굴이 간지러워도 웃는다.

남녀
부천 삼정공원에서

출퇴근 하지 않아 낮 시간의 집은 가득 들어오는 햇볕이 풍요롭게 느껴지다가도 동시에 끔찍하기도 했다.
집 안에 갇혀 나는 현모양처다. 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 시절에 들었던 음악조차도 듣지 않게 되었다.


오늘은 병원으로, 도서관으로, 고용복지센터에서 상담센터까지 오가는 버스 안,
창가 바짝 붙어 인천의 거리를 호기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심리상담 선생님이 인천은 “전통시장”이 잘 되어 있다며 모래내 시장을 추천해 주셨고
“우리 3회 남았어요.” 라고 말씀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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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인테리어

화이트 인테리어

자다 깨어 허연 천장을 멍하게 바라본다. 몰딩이 있던 곳은 하얀 페인트 칠을 하여 벽과 비슷한 색을 내려고 노력을 터지만 선명하게 다르게 보였다. 백색과 백아이보리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종종 깨어나면 내가 왜 여기 있지? 라는 생경함을 매번 느낀다. 잠들 때에는 주변에 핸드폰, 휴대용 캠핑 조명, 맥북, 안경 2개를 꼭 옆에 둔다. 유튜브 쇼츠에서 외로운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라고 본 것 같다.



나는 지난 30일 치핵수술 이후 배변장애와 엄청난 통증에 사로잡혀 잠들 때마다 자기 전의 외로움 따위는 사라졌다. 어떻게든 옆으로 누워야 했고, 잠을 많이 자도 쉬어도 다른 감정을 느낄 사이가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 몸이 편하면 생각도 많아지는 법.


치핵수술이 처음은 아니다. 아이를 낳을 때 치핵 때문에 고생해서 조리원 동기와 서로 번갈아 가면 아이를 봐주며 같은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그리고 광명을 찾았는데 딱 10년만에 재발했다. 배변습관을 개선하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한다는 사실을 관과했다. 막상 수술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깊고 사방을 도려냈다고 했다. 그러니 통증이 첫 수술 때와 비교도 안될만큼 고통스러웠다. 케어해줄 병원을 찾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지만, 결국 그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지혈주사도 맞았다.
4일이 지났다. 모든 것이 뒷전이 될만큼 아파왔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졌다. 원장선생님이 왜 다른 병원 굳이 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진다고 느꼈다. 나는 죽에서 일반식으로 넘어갔고 밥 맛이 없어도 억지로 먹었다.

한낮의 거실
독립 전 거실 풍경

낮 시간에 집에 있었던 과거의 나를 본다. 그땐 이혼 전이었는데도 혼자였지만 별스럽지도 않았다.
아는 동생이 “언니, 그게 별거예요.” 라고 했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집은 말끔하게 정돈하고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며 부엌에서 부지런을 떨었다. 그래서 낮의 밝은 집과 한적함은 그다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정리한 결혼생활을 다시 소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외로웠어도 큰 걱정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나는 무슨 힘으로 이혼을 했던걸까. 지금 생각해도 다 꿈같이 느껴진다.

어떻게 저 길을 지나왔지?

선명해질거라 믿고 걸어온 길 앞은 다시 화이트아웃이다. 과거에 머문 시선은 과거를 더 선명하게 또는 더 그립게 만들었다. 지금이 고통스러울수록 미화된 과거 속으로 자신을 끌고 갈테니까.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얼마 안되어 그가 내게 토할 것 같다는 그 심정을 이제서야 알겠다.

개나리가 폈다.

강가의 개나리

봄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계절을 핸드폰에 담는다.
아무리 잘 찍어 보려고 애를 써도 쨍한 노란 빛이 담기지 않는다.

산책하며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내면의 비판자는 끝도 없이 나를 다그치고, 작고 여린 꼬마 아가씨는 불안에 떨며 눈치만 보고 있다.
한번도 그 여린 꼬마 아가씨를 다독여준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이라도 조금씩 달래줘야겠다는 마음은 산책이 끝나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생겨났다.

아침에 라떼를 가지고 왔고 스레드에서 또래의 한 친구와 댓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고, 그 친구도 고마워했다. SNS를 하면 이렇게 잠깐 연결되는 기분은 들어도, 폰을 내려두면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주식계좌를 열어봤다. 귀여운 100원이 있었다. 삼성증권 모의가상계좌는 평일에 신청 가능하다고해서 더리치 앱을 깔아 해보았다. 금융상식없이 50대를 맞이해 회사가 내 미래를 책임져 줄꺼라 믿었던 걸까. 이런 생각은 30년을 한 직장을 다닌 사람도 5년을 다닌 사람도 같은 생각이다. 역시 직장은 마취제일 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까지 잘 마쳤는데 다시 PC 앞에 앉으니 졸려왔다. 전정 어지럼증이 발병한 이후 생긴 증상인데 잠이 부족해 졸리는 것과는 다르다. 자리에 막상 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자극 없는 상태에서는 또 과거의 기억들이 소환되어 꼬리 물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유튜브를 틀어놓고 생각들은 없애버린다. 내면소통 김주환 교수님은 생각은 자신이 아니라고 했다. 생각만큼이나 요망한 것도 없다.
주로 50대에 관한 콘텐츠를 듣곤 하는데 이번 생은 확실히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일어났다.
다시 PC앞에 앉아 전기세 걱정과 함께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결국 실시간으로 사용량을 체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무엇을 했는지 기록하기도 한다. 속상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이 올라올 때는 7칸 사고 기록지를 쓴다. 쓰고 나면 감정도 가라앉고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볼 수도 있다.
필사클럽은 며칠 째 정체 중이다. 독서가 가능하다는 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읽을수록 전 직장에 대한 회고가 고통스러울 땐 덮어두어야 했다.

퇴사하고 카톡은 더 조용해졌는데 퇴사 전에도 업무 카톡이 아니면 카톡이 울리지 않았다. 요즘은 필사클럽 단톡방 2개만 활발하다. 매번 메세지를 확인해도 될 만큼 양질의 메시지들이 오고 간다.
어쩌다 수신동의를 눌러 채널 추가한 광고들은 꾸준히 나의 안부를 묻는다. 차단하는 것도 일이라 올 때마다 알람을 꺼두는데 끝이 없다.
어제와 오늘은 책을 보며 회고하는게 힘들어 덮어 두었다.
며칠 째 저녁 4시부터 6시까지 극심한 우울감과 아랫배 통증이 있다. 해가 지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아졌던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회사 다닐 때도 그랬다. 해가 뉘엿 저갈 때 쓸쓸한 마음은 그때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취제가 풀리자 눌러두었던 모든 감정들이 봐달라며두등실 떠다닌다.

나는 혼자 놀기 잘하는 사람이었다. 혼자 영화 보러 가고, 집에서 혼자 책을 보고 카페에 혼자 있어도 지금과 같은 외로움과는 견줄 수 없다.
완전한 자유와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은 서로 자리만 바꾸었을 뿐 달라진 건 없다.
5년 전 나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외면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씩 내 앞에 과제처럼 놓였다.

 

 

 

전남편이 내게 가하는 가장 큰 복수

변호사에게 먼저 연락이 온 건 처음이었다. 대부분 행정적인 말투고 빨리 해치우려는 목소리도 멀치감치 들린다. 혹 무선 전화기라서 그런가요? 라고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 못했어요. 네네~ 네?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번 변호사는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공감도 잘하는 편이어서 의아했다.

감치를 원하냐는 했다. (내가 그걸 원할리 없다.) 아이의 권리니까 어른인 내가 나서는 것 뿐이라고 했다. 사실 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가 역겹기도 했다. 마지막 양육비이기도 하고 양육자가 실직자에 요양 중이며 아이도 희귀질환을 앓고 있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니기 어렵다고도 전했다.

‘그가 힘든 상황인 것 같다. 올 초에 일정 금액을 보낸 걸 보면.. ‘ 라고 말했다. ‘돈이 있으면 보낼 사람이긴 하다.’ 라고도 덧붙혔다. 변호사는 아이가 법적 성인이 되면 아무리 연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미성년의 양육비에 비해 판사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양육비이행관리원 담당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었다. 변호사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했고 며칠 뒤 사건이 접수되었다는 안내장을 받았다.

변호사는 아빠가 아이를 만나지 않고 연락도 끊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멍든 명치를 무직한 돌이 얹어진 기분이다. 본인이 사십대가 되어 아버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혔다. 아들에겐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니다.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필요하다. 거대한 산과 같은 절대적 백그라운드.

아이는 많은 부분이 전 남편을 닮았다. 특히 검소하고 물질에 욕심 내지 않는 것도 닮았다. 아이와 나는 이젠 아무렇지 않게 그의 이야기하곤 한다.

아이는 엄마를 선택함으로써 아빠를 잃었고 그것은 전 남편이 내게 가하는 가장 큰 복수이기도 했다.

양육비는 별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할 것이다. 언제나 결과는 내 몫이 아니다. 그러니 안타까워 말라.

산책, 동물 다섯 마리 사진 찍기 미션

아이는 ○○까지 등하교를 하고 있다. 근 2시간 거리지만 인천에 이사 와서도 시흥에 있는 교회를 기꺼이 다니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똑같은 가방을 메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엄마, 산책길에서 동물 사진 다섯마리 찍어 보내~”

매사 긴장해야 했던 사회생활이 끝나고 나니 승모근 통증이 절로 사라졌는데 대신 그 자리에는 우울과 불안이 자리했다. 잠을 잘 못 잤는지 허리가 아파 걷기 싫기도 했다. 영하의 날씨도 아닌데 롱패딩 차림이었다. 제법 바람이 불어 나쁘지 않은 옷차림이었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은 예전보다 짧아지고 얇아졌다.

아이가 낸 숙제를 하기 위해 강가로 바짝 붙어 걷고 있는데 이른 아침이라 동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길고양이를 만날 수 있을까 했지만 멀리 비둘기 한 마리를 찍었을 뿐이었다. 혹시 사람을 동물이라고 우겨볼까 잠깐 생각이 스쳤지만, 도촬은 옳지 않다. 되돌아오는 길에 마른 나뭇가지의 노란 새(꾀꼬리로 추정)를 보았다. 아, 너무 예뻤는데 역시 틈을 주지 않는다. 귀여운 참새들 무리도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날아가 버린다. 참새 사진은 숨은그림찾기 수준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고 하루 30분 엑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엑셀을 전혀 못하는 건 아닌데 함수나 단축키, 많은 데이터를 원하는대로 추출하는 연습을 해보고 싶어 시작했다. 메모까지 해가며 30분 한다던 공부가 2시간이 넘어갔다.
단종앓이 때문만은 아니다. 갑작스레 떠오르는 상념이 죄책감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나는 인생을 통틀어 아버지 돌아가실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었다.
“이거 해서 뭐해? 네가 어디에 취직할 줄 알고? ” 라는 사고는 아주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감정은 몸을 움직여야 해결된다고 내면소통의 저자 김주환 교수가 말했다. 그래서 오후 산책을 또 나갔다. 가을 날씨처럼 청명하고 맑았으니까 충분했다. 그늘지지 않은 곳으로 걸었다. 평소보다 더 멀리 걷다보니 ○○동 성당이 나왔다. 한참 시선을 두고 있다 발걸음을 돌렸다.
군데군데 봄 기운이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푸릇하게 새싹이 돋기도 하고 그 사이 드문드문 쑥도 보인다.

강가의 왜가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왜가리를 만났다. 강가에서 곧은 자세로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가까이 있어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조그마한 새들과 달리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물에서 나와 조심조심 수풀 위를 걸어 다닌다. 늘 물에 잠겨있던 왜가리의 발이 닭발처럼 생겼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었다. 왜가리의 가늘고 긴 까만 깃털이 바람에 나부끼지 않았다면 “화면정지 아님” 자막이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아이가 곧 하교할 시간이다. 4개의 동물 사진을 보냈다. 오늘 간식은 삶은 계란이다.

– 왜 5개의 동물사진이야?
– 5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

– ITZM




영화, 왕과 함께 사는 남자

CGV 영화입장권, 왕과 함께 사는 남자

아이와 집 근처 CGV에서 왕과 함께 사는 남자를 예매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이후 아이와 보는 두번째 영화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만 해도 손수건을 챙겨야 한다고 했거늘, 주말엔 배차 간격이 넓어지므로 곧 온다는 버스를 놓칠까봐 손수건 생각은 잊은 채 정류장으로 달렸다.

점보팝콘과 제로콜라

스산한 기운은 부천 롯데시네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죽은 상권에 극장이 들어와 있는 이유가 궁금해져 혼잣말하듯 아이에게 물었다. 극장을 일부러 입점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싶어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키가 참 많이 컸다.
영화관은 모든 것을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먹거리는 완비되어 있었다. 라면과 짜파게티를 끓여 먹을 수 있고 닭강정도 있었다.
그래도 영화에는 팝콘이 빠질 수 없다. 고소한 맛과 달콤한 맛 반반을 점보 사이즈로 시켰다. 앞 줄의 키가 큰 관람객의 머리만 아니다면 방해되지 않는 프레임에서 볼 수 있었겠지만, 다행히 화면에 몰입되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영전 영화관

유해진(엄흥도 역) 특유의 가볍고 코믹한 장면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깊어지는 슬픔과 강한 대비를 이루었다.
손수건도 없었으니 양소매를 빼어 어린 아이처럼 울 수 밖에 없었다.


14세의 어린 왕이 자신이 성장할 때까지 방패가 되어주던 주변 인물이 하나 둘 사라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었을까. 그래서 그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생애 가장 인간답게 살며 생기를 되찾았던 모습은 안도보다 정해진 시간에 끝날 결말이기에 더욱 슬퍼 보였다.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끝까지 끌고 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시련과 평화를 번갈아 주는 법이니까. 자신의 목숨을 적이 아닌 함께 했던 사람에게 부탁했을 때의 마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도대체 권력이 뭐길래 라는 의문은 현대적인 시선일 뿐이었다. 어린 소년(소녀)이 단단해진 눈빛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백성들의 “사랑”이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이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소년(소녀)들은 그런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을까? 나의 17세는 어떠했을까?

어르신들의 키오스크 주문을 도와 드리고 있는 20살 청년

역사적 배경이 궁금해져 집에 돌아와 몇 시간을 단종에 대해 검색했다.

내가 이 영화에 투사한 건, 어린 단종을 지켜줄 사람이 없던 배경 때문이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홀로 있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을 텐데, 결국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절망은 강가에서 물장난을 치는 어린 소년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 유배지에서 함께 했던 백성들과의 시간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노루 이야기가 야화에서 나왔다거나 사건을 각색했다 하더라도, 단종의 일생은 비극이었다.

다이어리 모음전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슬픈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영화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다짐도 필요 없었다. 슬픈 영화를 보고 슬펐을 뿐이며, 지금의 나는 충분히 애도해도 되는 때였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던 17세의 내가 떠올라서일까. 17세에 아버지와 절연했던 아이의 모습 때문일까. 그때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

밀린 양육비를 받는다고 해서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서 마지막 양육비를 받던 못받던 궁핍한 생활은 예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병원치료까지 하고 있으니 막막함과 불안은 동시에 찾아왔다.
나는 아이가 아니라면 살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오랜 세월 엄마로만 고립된 채 살아왔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제 내 인생을 살라는 말을 듣는 나이다. 나는 이럴 때마다 나이값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어떻게 살아야 아이에게 모든 의미를 걸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집에 돌아와 옷가지를 정리하고 책상머리에서 쌓아둔 지난 다이어리를 펼쳤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 책장에서 쓰지 않은 다이어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2025년 교육박람회때 받았던 오렌지 빛의 다이어리에는 온통 버티기 위한 글들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혼 전부터 불안하고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와 업무를 해내려고 하는 의지가 뒤섞여 영화로 슬펐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둔 단종이 엄흥도를 바라보던 눈빛이 떠올라 또 눈물을 훔쳤다. 극 중 언젠가는 잡아먹힐 노루의 처연한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
다이어리 속 나는 내내 외롭고 슬퍼했다. 무슨 힘으로 이제껏 살아왔던 걸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 버티는 것 만으로도 에너지를 다 썼을테고 그 와중에 외로움과도 싸워야 했으니까.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여전히 계획도 희망도 갖기 어렵다. 낙담한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이 없기 때문일까, 어쩌면 함께할 누군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 이 글이 남자(남편)가 없어 외로운 여자의 푸념이나 이혼녀의 후회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이혼 전에도 그랬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일상,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

한적한 평일,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1시간 넘게 듣고 있다. 퇴사하고 한 달만에 집순이 루틴에 적응해 버렸다.

‘전기세가 평소보다 더 나오겠구나.’

일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으로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해보지만, 대부분은 집안 일이고 빌려온 얇은 책들은 1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50대, 이혼녀, 실직자로 가득 채워졌다. 정답을 찾고 싶은 검색 덕이다.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찾지 못했다. 50의 마음가짐이란 모든 50대에게 적용되는 것일까. 욕심을 버리라는데 응?

내가 얼마나 욕심을 부렸다고.
1인 분 밥값이나 좀 하겠다는데.

논어가 등장했다가 주역이 등장했다가 50대 빈곤에 대한 이야기, 평범했던 사람이 노숙자가 된 사연들을 보면 답답해 져왔다. 언제나 내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막을 깨는 초인종 소리, 소독을 하러 왔다는 아주머니는 약품통을 백팩처럼 메고 있었다. 다들 열심히 자기 일을 하고 있다.
PC앞에서 여러 일들을 처리 하다보니 1~2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갱년기 약을 먹어야 할 타이밍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없는 것처럼 숨죽이며 있을 때도 있고 주방에서 달그닥 거리며 부지런을 떨 때도 있다. 남는게 시간이라 중고로 샀던 식기 세척기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아이가 초저녁 잠을 청하고 있는 동안 오늘 하루 종일 밖을 나가지 않아 옷을 주섬주섬 입고 똥강으로 산책을 갔다.

어딘가 모여든 사람들, 원앙 2마리가 강가에서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오기 전에 얼릉 멀리 가야할 텐데 라고 말했다. 나는 고양이가 원앙을 잡아먹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몇 걸음을 못 가 원앙을 사냥해 먹는다는 그 길고양이를 만나게 되었다. 캣맘도 있는 것 같은 흔적들이 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을까.

대학생이 된 아이는 수업을 듣고 오자마자 학우들에게서 받은 먹거리를 호주머니에서 꺼낸다. 매일, 삶은 계란부터 홍삼 스틱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아이 학교에는 만학도들도 많아서 간식거리는 대부분 그 분들이 싸오셨으리라 . 아이는 학교에서 들었던 강의 내용이나 인상 깊었던 일들을 재잘댄다.

중학시절, 학교 다녀오면 가방을 내려놓자 마자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가 듣던 말던 재잘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암투병을 시작하면서 우리 집의 시간은 멈추었고 고독한 사춘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이 세차게 지나간 후 나는 영원히 엄마에게 나를 말하지 않았다. 독립이 아니었다. 단절이었다. 줄곳 타인에게 나를 말하거나 싫다는 내색을 하거나 요구하는 일에 서툰 이유다. 내내 그래왔다.
불과 얼마 전에 퇴사한 회사에서 마저도.

-ITZM

50대 실직자의 낯선 산책기

해가 있을 때 걷고 싶어 서둘러 긴 모직코트에 얇은 목도리까지 두르고 산책길을 나섰다. 오랫동안 집안에서만 지내는 은둔형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모른다더니 딱 그 꼴이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소리를 내며 불편한 걸음을 하는 장애인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 보호자로 보이는 분은 그와는 조금 떨어져 앞서 걷고 있었다. 어쩌다 그와 걸음 속도가 비슷해져 꽤나 긴 코스를 내내 같이 걷게 되었는데 그가 내는 소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움찔했다가 있지도 않은 에어팟을 호주머니에서 뒤적거렸다. 어지러움 때문에 요즘은 에어팟도 잘 안끼니까 가지고 오지도 않았던 것. 그래도 조금 더 걷다보니 그 소리도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 목도리는 풀고 손으로 들고 다녔다. 외투를 벗어도 좋을 만큼 날은 관대해졌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벼운 외투를 입고 있고 겉옷을 벗어 허리춤에 동여매고 뛰는 사람들도 보였다.

똥강엔 녹조도 심하고 물도 더러운데 불법 낚시꾼들은 평일보다 많았다. 낚시금지가 여기 저기 꽂혀 있었지만, 진짜 물고기가 잡히는지 의문이라 가까이 다가가 생선(!)이 정말 잡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다른 산책로를 걷고 싶어서 검색했는데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 포기하고 마저 걸었다.
이 곳이 낯설어서 싫은 건지, 낙후된 풍경들이 싫은 건지, 어쩌다 인천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선택했지만, 내가 선택한 것 같지 않은 느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싶은 순간들, 모든게 꿈 같아, 부대껴도 이제야 나 답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실직하고 나니 모든 게 바사삭 부서졌다.

중장년 취업 솔루션이나 후기들을 보면 더 답이 없어 보였다. 나만 가진 고민이 아닌게 위로가 될리 없다.
또 다시 쓸모를 증명하려 애를 쓸수록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증명하지 않고도 살 수 없을까. 최소한 나 스스로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사랑스러울 순 없는 것일까.

내 나이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사회복지사도 생각해봤는데 그 공부도 2년은 걸리겠고 그동안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지 싶었다. 구인공고를 볼 때마다 내가 가려고 하는 회사의 지원자는 대부분 20-30대고 나는 시니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장년 치곤 PC와 AI툴을 잘 다루는 사람이고, 어쩜 이렇게 애매할 수 있나 싶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지? 아니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 하다하다 산책길가의 바윗돌마저도 슬퍼 보였다. 지독한 우울증은 몸을 움직이라 말하는데 전정 어지럼증은 무조건 쉬라고 말한다.




병원에서, 일을 안하면 어때요?

시간에 매이지 않아 한적한 병원 나들이, 무직자 답게 여유로웠다. 전정 어지럼증약이 듣지 않는 것인지 전정 어지럼증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인지 약이 소용없는 날이 이틀째 지속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은 생계보다 자기효능감이나 인정욕구를 채울 수 있어서 일을 했을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게 왜요? 내가 무엇이 되어야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를 잘해야 인정 받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녀야지만 사람 노릇한다고 했다. 때가 되면 결혼해야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언제나 나는 그런 조건이 붙었다.

70년대생이라면 그런 주변 분위기에 압도 당하며 지내왔을 가능성이 크다.당연히 엄마에게 인정 받으려면 그 나이에 맞는 나이 값을 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철이 없다 라는 소리를 듣고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앞가름을 못해서 인지 철이 없다라는 말은간간히 들어왔던 것 같다. 집이 아닌 곳에서는 인정 받으면서 집에만 오면 작아졌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이 편했을리 없다. 가족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스스로도 납득했기 때문에 불편함도 감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나의 도피성 결혼의 결과가 오늘의 나일까?

8회기 심리상담치료에서 전직장 트라우마를 조금이라도 꼬맬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끝도 없는 반추로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만한 상태”는 8회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심리치료의 궁극적인 목적도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시네요.” 라며 동의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좋은 엄마도, 열심히 하는 직원도 아닌 내가 나로 살아도 안전한 일상이다.
까치발을 들고 선반 위에 올려진 물건을 꺼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회사를 다니는 내내…

그러나 나는 이제 보호자 없이도 수술할 수 있으며 병원에 있는 동안 누군가 방문해주길 바라는 마음도 갖지 않아도 되었다.
손목골절 당시에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정리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회사까지 그만 두게 되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져 지독한 고립을 맞이했다.

괜찮아?

누군가와 닿는다해도 갈증은 해소될리 없었다. 느슨한 인간관계를 또 찾으면 될텐데 지금은 그럴 에너지가 없다.
어제 오늘 이제껏과는 다른 어지러움이 시작되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괜찮지 않은 감각,봄동을 다듬고 양념고기를 구우며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어지럼증 약 때문에 멍한 것일까. 그런데도 어지럼이 계속 되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예약을 서둘렀다.
이젠 연차 눈치 안보고 내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예약할 수 있다.

목사님으로부터 운전을 배우고 있는 아이는 2시간 거리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아이의 진득한 고집스러움이 때로는 안타깝고 그게 또 우리 아이지 싶었다.
아이가 언제 오는지 카톡으로 물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1층 공동현관문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본다. 처진 눈커플, 선명해지고 있는 마리오네트 라인, 작디 작은 몸, 그리고 기쁨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평가하지 않고 쓸모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가능한가? 머리로는 알겠지만, 도무지 안될 것만 같은데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일을 안하면 어때요? 꼭 일을 해야 해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다. 도대체 일을 안하고 어떻게 생계를 이어 가는 거지?

-ITZM

실직 이후의 삶, 유튜버?


오늘 유튜브에 첫 영상을 올렸습니다. 3분 영상 하나를 만드는데 반나절을 썼습니다. 물론 첫 영상이라 틀을 잡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습니다. 올리고 나니 자막 위치는 아래로 조금 내려와야겠고 하고 싶은 말 한마디로 뾰족한 주제로 3분 정도의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 하고 싶어요. 편집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도록 하려고 합니다.
한부모 가장이 실직하면 생의 위협을 받지만 그래도 일상을 살아내려는 모습과 실직 당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 목소리도 만족스럽지 못해서 자막과 영상, BGM으로 구성했습니다.

한부모 가장이 실직한다는 건

불안은 신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신체화 증상이라고 하죠. 복부 깊은 곳에서 간질거리며 곪아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배꼽 아랫쪽이었고 때로는 자궁이 있는 아랫배도 그랬습니다.
아프면 손이라도 대어볼텐데 통증도 아니라서 아직 정의할만한 단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잠들기는 어렵지 않지만, 자고 막 일어났을 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우울감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렵게 합니다. 온전히 혼자며 너가 선택한 것이니 모두 혼자 감당해야지라는 가혹한 목소리도 들립니다. 아이에게 뭐라도 먹이려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킵니다.

그래도 하루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심리상담 적합 판정 연락이 와서 미리 알아봐 두었던 심리상담센터에 바로 예약을 했습니다. 12:30으로 애매하긴 하지만, 시간은 변경하면 되고 매주 화요일마다 상담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일에 매달려야 스스로를 용서할 것만 같은 마음으로 때때로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고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상처 받은 마음과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기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나로 사는 것은 마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50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고 경단 5년의 경력으로는 하던 일을 계속하기 어려울 거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영상 틀을 구성하면서 겨우 컷편집 정도 하는 건데 영상제작을 한다고 말할 수 있나 싶었습니다. 블로그와 유튜브를 운영하는게 마케터라고 할 수 있나, 조직을 나와서야 고인물로 지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재주 중에 하나가 늘었을 뿐, 집단에서 나왔을 때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내가 무얼 좋아하지? 라는 질문보다
나는 무얼해야하지? 라는 질문으로 살아왔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라 무얼 좋아하는지 자문하는 것 조차 사치가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사 2급 자격 취득도 생각해봤습니다. 멀티가 되는 다재다능한 사회복지사라면 50대여도 괜찮지 않을까. 하하, 3월까지는 취업 활동은 어려울테고 4월에는 긴급복지지원을 신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을 하게 되면 많은 부분이 좋아질거라 믿습니다. 물론 전 직장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가 먼저겠죠.

– IT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