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안하면 어때요?

시간에 매이지 않아 한적한 병원 나들이, 무직자 답게 여유로웠다. 전정발작약이 듣지 않는

것인지 전정발작이 아닐수도 있는 것인지 약이 소용없는 날이 이틀째 지속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은 생계보다 자기효능감이나 인정욕구를 채울 수 있어서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그게 왜요? 내가 무엇이 되어야만 사랑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를 잘해야 인정 받고,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녀야지만 사람 노릇

한다고 했다. 때가 되면 결혼해야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언제나 나는 그런 조건이 붙었다.

70년대생이라면 그런 주변 분위기에 압도 당하며 지내왔을 가능성이 크다.당연히 엄마에

게 인정 받으려면 그 나이에 맞는 나이 값을 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철이 없다 라는

소리를 듣고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앞가름을 못해서 인지 철이 없다라는 말은

간간히 들어왔던 것 같다. 집이 아닌 곳에서는 인정 받으면서 집에만 오면 작아졌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이 편했을리 없다. 가족이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

는 걸 스스로도 납득했기 때문에 불편함도 감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나

의 도피성 결혼의 결과가 오늘의 나일까?


8회기 심리상담치료에서 전직장 트라우마를 조금이라도 꼬맬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끝도 없는 반추로 에너지를 다 쓰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만한 상태”는 8회로는 어림도 없어보였다.


심리치료의 궁극적인 목적도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시네요.” 라며 동의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좋은 엄마도, 열심히 하는 직원도 아닌 내가 나로 살아도 안전한 일상이다.

까치발을 들고 선반 위에 올려진 물건을 꺼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내내, 회사를 다니는 내내…

그러나 나는 이제 보호자 없이도 수술할 수 있으며 병원에 있는 동안 누군가 방문해주길 바

라는 마음도 갖지 않아도 되었다.

손목골절 당시에 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정리되었다.

그리고 정말로 회사까지 그만 두게 되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져 지독한 고립을 맞이했다.


괜찮아?



누군가와 닿는다해도 갈증은 해소될리 없었다. 느슨한 인간관계를 또 찾으면 될텐데 지금은 그럴 에너지가 없다.

어제 오늘 이제껏과는 다른 어지러움이 시작되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괜찮지 않은 감각,

봄동을 다듬고 양념고기를 구우며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전정발작약 때문에 멍한

것일까. 그런데도 어지럼이 계속 되는건 왜인지 모르겠다. 재빨리 예약을 잡았다.

이젠 연차 눈치 안보고 내가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예약할 수 있다.


목사님으로부터 운전을 배우고 있는 아이는 2시간 거리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아이의 진득한 고집스러움이 때로는 안타깝고 그게 또 우리 아이지 싶었다.

아이가 언제 오는지 카톡으로 물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1층 공동현관문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본다. 처진 눈커플, 선명해지고 있는 마리오네트 라인, 작디 작은 몸, 그리고 기쁨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하면 얼마나 좋을까.

평가하지 않고 쓸모없어도 괜찮은 사람이 가능한가? 머리로는 알겠지만, 도무지 안될 것만 같아

“일을 안하면 어때요? 꼭 일을 해야 해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이다. 도대체 일을 안하고 어떻게 생계를 이어 가는 거지?


-IT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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