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리단길과 하루

"우리에게 삶을 담아낼 어휘는 항상 모자르고, 삶은 언제나 말보다 크다는 것" 

- 「다가오는 말들」 은유, 어크로스, 8p

아침에 일어나니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것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다시 잠들어도 좋으련만, 하루를 시작한다.
횡폐해진 채 라떼를 의무처럼 가지고 오며 오늘은 우유를 덜 부었네 한다.
출근하느라 이중주차된 차를 피해 이리저리 지나가는 사람마저도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마당을 피해 골목길로 향했다.
겨우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도보,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을 지나 설마 여기에 길이 있을까 싶은 곳으로 향한다.
누군가 뒤에서 사뿐히 걷는 소리가 들린다. 앞서 질러 가라고 살짝 옆으로 비켰지만 묵묵히 같은 방향의 길을 함께 걷는다. 그 수많은 동 중에 하필 같은 동, 그가 여성임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계단을 올라가는 템포는 평소보다 빨라졌다.

얼마 전 읽었던 은유의 다가오는 말들을 읽다가 연체되어 부랴부랴 반납하고 필사해두었던 다섯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책은 빌리는게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명언에 다시 무게가 실리며 마음이 갸우뚱 거렸다.
독서가 먹고 살만할 때나 가능하다 믿었던 때도 있었다. 자리만 차지하고 책꽂이에 장식처럼 꽂혀 있는 책들은 이사하면서 가장 골치 아픈 짐덩어리라 더는 늘리지 말자했는데 지금은 퇴사한 덕분에 호사를 누리고 있다.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몸도 정신도 가장 쾌적한 시간에 무얼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졸리거나 피곤하면 할 수 없는 일부터 해볼까? 마음이야 종일 그림만 그리고 싶지만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서사의 힘은 끝까지 붙들어 놓는다. 한 눈을 팔 수도 없고
복잡다단한 마음 어딘가에 닿았던 서사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소박하게 10분 이상 독서 2주 챌린지에 참여 중이다.
중간에 두어번 빠트리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다. 중간에 빠지더라도 다시 하는 힘을 믿는다.
리드앤리드 필사클럽과 같은 활동만 하다보니 건조해져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스레드 피드를 보다 인천지역의 서점 주인장이 운영하는 곳이 있어 당근모임에 가입을 했다.
언젠가는 가보겠지하는 안일한 마음이 들만큼 먼 거리의 책방이었다.

평소 지켜보다 작가이자 교수였던 그녀가 커피챗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에세이 쓰는 법 강좌가 떴길래 재빨리 결제를 했다. 강의시간이 오후 9시라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졸면서 듣겠구나 싶고, 매일도 아니고 금요일 하루이고 3회이니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노트가 다 떨어져서 평리단길까지 가서 노트를 사왔다.
년도가 지난 다이어리들까지 모두 다 썼기 때문이다. 퇴사를 하니 쌀도 아쉽더니 다이어리도 아쉽다. 나중엔 박스테잎도 아쉬울까?
클로드에게 우리집에서 가장 가까운 필사노트 팔만한 곳을 찾아봐 달라고 했더니 대형문구점 2곳을 소개해줬다.
어디든 어떠랴 해서 집을 나섰는데 가다보니 평리단길이다. 심리상담 받으러 다닐 때 부평구 보건소 근처라 몇 번이고 가보려다 못갔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러나 막상 버스에서 내리자 나는 시내의 거리를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프리마켓도 있고 분수대도 있고 왠만한 옷가게는 종류별로 다 있는데도 상상할 땐 궁금했는데 막상 가보니 흥미가 떨어졌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환승입니다. ”
이제는 소비하는 문화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걸까, 나이가 들어선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이제 엄마도 나처럼 되는거야.”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이 때문만은 아닌걸까.
이젠 막연한 동경으로 홍대 일대를 좋아했던 나는 어디로 간걸까.

인천 남창문구사

골목 사이에 있는 대형문구점 주인은 다이어리의 종이 두께 단위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이어리 코너에서 가장 나은 걸로 골라 가지고 왔다. 그러곤 하는 속말, 그냥 쿠팡에서 살껄 그랬다. 그래도 백아이보리 커버는 좋다. 이 정도면 “백아이보리 성애자”가 맞다. 색으로 고민하면 나는 항상 백아이보리나 흰색이다. 때가 타겠지. 꼬질해지는 그 맛에 선택하지.
집에 와서 바로 뜯어 볼만도 한데 오자마자 데이터분석 강의를 듣는다.

퇴사하던 날, 나에게 피벗테이블을 아냐며 면박을 줬던 팀장님의 말이 생각나서 이게 뭐라고.

“다 씹어 먹어버리겠다!!”

당시 나는 엑셀과는 무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억지스러운 모진 말로 그렇게 밀쳐냈다.
그 장면이 떠오르면 여전히 아프다.
그럼에도 전직장 동료들이 일하는 모습이 상상되어 부러웠고 이 시간에는 무얼 하고 있겠구나 싶었고 이번에 온 신입사원은 잘 적응하고 있을지 쓸데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의외로 법인 고양이가 보고 싶거나 하진 않았다.

접시꽃

8시가 되어도 밖은 밝다. 하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창가에서 목 뒤덜미로 불어온다.
작년에는 알지 못했던 6월의 선선한 바람일까. 그때도 불었을 바람을 기억하지 못한 거겠지.


린 스타트업을 읽고 필사를 오랜만에 했다. 월요일에 공지한 주간필사인데 목요일에 제출했다. 그냥 읽을 때와 영진님이 제시한 문장을 노려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린 스타트업이 어려운 이유는 번역의 문제도 있지만, 저자만의 정의된 단어가 있는데 그게 종종 다르게 해석될 때 혼란을 겪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매번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문장으로 바꾼다.
업무가 아니여도 린 스타트업은 쓸모없는 완벽주의, 즉 평가와 불안에 기반한 완벽주의는 린 스타트업 정신에 위배된다.
은유의 다가오는 말도, 린 스타트업도 내게 부여하는 과제는

너를 계속 말하라 였고
권리를 주장하라였고
건강한 의존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그냥 자면 되는데 부지런한 아이는 오늘 자기 전엔 무얼할까. 라 물었고
나는 매일 정체 모를 무엇과 이별하는 기분을 쇼츠에 시선을 돌리고야 만다.


오늘도 바람이 많은 날이었다.
평리단길보다 구석에 있는 집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바람이 더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 집이 나의 집이 맞는걸까.

– IT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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